살인의 해부 (오토 프레밍거 감독, Anatomy of a Murder, 1959)

2008. 2. 19. 20:41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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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해부] 혹은 명확한 강간의 증거

[Reviewed by 박재환 1999-4-11] ..1999년 4월 10일(토) EBS <세계의 명화>에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살인의 해부>(1959)이 방영되었다. 오토 플레밍거 감독은 몇 달 전 방영한 마릴린 몬로의 <돌아오지 않는 강>을 감독한 사람이다. 영화시작 전, <세계의 명화>의 독특한 진행방식의 하나인 전문가(영화평론가-요즘은 유지나 교수가 아니라 정용탁 교수가 진행함-한 달에 한 번씩 진행자가 바뀐다고 함) 나와서는 영화를 소개해준다. .. 옛날영화를 소개해주는 이러한 시청자 팬서비스가 굉장히 고맙고 정말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정 교수는 이 작품이 아카데미 7개 부문에 후보에 오른 명작이지만 단 한 부문에서도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바로 <벤허>가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럼, 살인의 현장으로, 배심원의 자리로 돌아가서 영화를 보자.

<살인의 해부>는 제목부터 시선을 끈다. 이 영화는 법정드라마이다. 상영시간 160분이라는 굉장히 긴 호흡의 영화이다. 그러나, 실제 법정장면에 연결되기까지 1시간 동안은 그 준비과정을 지켜보아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각 등장인물의 성격과, 혹은 살인의도, 혹은, 사실여부를 조금씩 그려보게 된다.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의 한 한적한 마을의 검사로 퇴임한 폴 비글러(제임스 스튜어트)는 낚시로 소일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남편의 변론을 맡아달라는 한 여자의 부탁이었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이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의 중위인 남편(벤 가자라가 연기하는 매니온 중위는 우선 겉보기에도 뭔가 숨기는 면이 있는 것도 같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같고, 여하튼 영화를 끝까지 보아야만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역을 잘해 내었다)이 사람을 죽인 것이란다. 왜? 로라 매니온(리 레믹)의 말로는 퀼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강간했고, 남편은 분에 못 이겨 권총으로 퀼을 쏘아죽였다는 것이다. 자, 그럼, 평소 법정드라마 아니면 범죄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인식을 갖게 된다.

우선은 범죄의 정황이다....  피고 측 입장(변호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인의 동기가 중요하고, 그 정황의 제어불능을 강조해야할 것이다. 홧김에.. 욱하는 심정에... 분노에.. 말이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처리하고 법정에서 주장하게 될 것이다. 살인은 살인이다. 그리고 강간이라는 것은 결코 알 수 없는 피해자의 일방적 증언, 혹은 변명일 뿐이다. 평소 여자의 하는 '짓거리', 입고 있는 꼬락서니', 여자와 남자(아내와 남편)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분명 살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 그럼 실제로 우리의 슈퍼 히어로 변호사 폴 비글러는 어떻게 사건을 요리해 나가고, 검사는 어떻게 교수대에 보내기 위해 (살인목적을 가졌기에 종신형에 해당한다고 함) 노력할까. 그리고, 12명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어떠한 제스쳐와 어떠한 화술을 펼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 미국 법정드라마를 보는 재미 아니겠는가. 문제는 강간과 살인이 개입된 문제이고, 피해자는 뭔가를 숨기는 것 같고, 그것보다 더 한 것은 저쪽 검사가 너무나 막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강간사건 관련 재판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강간사건이 거의 종결되지 않고 중간에서 그만두게 되는 경우는 그러한 이유가 있단다. 너무나 적나라한 진행이기 때문이란다. "강간 당했다고요? 웃기고 있네. 청바지 입은 상태에서 말인가요? 그날 입술 루즈 색깔이 빨간 색이었나요? 오렌지색이 남자를 자극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평소 귀가시간이 몇 시였죠?" "저 남자 사귀기 전에는.. " 뭐. 이런 변호사의 말은 신사적이고, 얌전한 편이라고 한다. 도저히 여자 측, 혹은 피해자 신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한 말들이 나온단다.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한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요. 말도 안 돼요. 남자가 그런 자세로 나올 때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 뭐.. 그런 식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여자의 복장과 이전 행동과 "성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이것은 강간이 아니라, 남녀간의 "화간(둘이 좋아서 한 섹스)"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과정에서 여자측은 모욕적인 언사와 가족들 앞에서 부끄러웠던 비밀이나 과거가 들추어지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간'관련 재판은 끝까지 진행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종결되고 만다.

 

 

40년 전 미국도 비슷한 점이 있다. 검사측은 ‘강간’을 무시하고 ‘살인’에 촛점을 맞춘다. 하지만 변호사는 "강간"의 존재를 밝히고, 그것이 불가항력이었음을 밝히려 애쓴다. 문제는 몇 가지 있다. 피해자의 몸에서 어떤 증거(정액)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우선 강간피해자의 몸에서 그것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여자가 당했을 때 입었다는 팬티가 사라진 것이다. 검사는 나중에 이점을 들어 평소에 팬티를 입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밤에 나다닐 때 말이다. 이 영화는 여기까지 오면서 '강간'과 '팬티'라는 용어를 어쩔 수 없이 법정에서 쓰게 됨에 따라 낯 뜨거운 면이 없지 않아 나오게 된다.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1959년!) 이러한 용어사용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도 하다.

변호사는 이러한 전략을 세운다. 미국 판례에 따르면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의한 심리분리(뭐, 비슷한 용어였는데 어렵네...temporary insanity) 현상에 따른 살인 - 그 의도가 살인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이-은 무죄라는 것이다. 검사는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었으며, 설사 강간이었다고 하더라도, 피의자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총을 들고는 곧장 찾아가서는 다짜고짜 쏘아죽인 ‘1급살인’이라는 것이다.

법정공방은 불꽃 튀기고, 변호사-검사의 심리전은 아주 치열하다. 검사는 죠지 C. 스코트가 맡았는데 둘 다 열연을 펼친다. 판사의 연기도 너무 좋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법정드라마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뜻밖의 증인의, 뜻밖의 말 한마디이다. 그리고 그러한 증인을 법정을 세우기 위한 어떤 과정. 물론 이러한 과정은 정성과 진심이어야 한다.

물론 영화는 법정 드라마의 흥분과 재미와 감동을 모두 만족시킨다. (박재환 1999/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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