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천하대전: 항우 vs. 유방

2012. 1. 18. 17:39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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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흥미로운 중국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홍콩출신 이인항(李仁港) 감독의 <초한지 천하대전>이다. 중국원제는 <홍문연 전기>(鴻門宴)이다. 중국사를 안 배웠다고 하더라도 이 말은 삼국지의 적벽대전만큼 유명한 말이다. 지금부터 무려 2400년 전인 기원전 206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 혹은 재해석이다. 때는 진시황이 죽고 중국천하가 또 다시 혼란에 휩싸였을 때. 중원을 석권하게 되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일개 동네건달에서 한(漢) 제국의 황제가 되는 유방(漢高祖)과 ‘패왕별희’의 히로인 항우, 그리고 제갈량 버금가는 모사가 장량 등 드라마틱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기대할만한 중국역사물이다.

유방, 항우를 이기다

영화의 시작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일단의 사람들이 유폐된 커다란 궁궐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때는 한 고조가 세상을 떠난 뒤 12년. 태부가 학생을 데리고 찾아온 곳은 유방이 한을 세우는 역사의 길목이었던 ‘홍문연’이 열렸던 장소를 다시 찾은 것이다. 이곳에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정체불명의 노인네가 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방과 항우가 어떻게 천하를 두고 싸웠는지, 그리고 당시 ‘홍문연’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죽고 중국은 또다시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 빠져든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천하가 다시 혼라스러워지자 그 정의(?)의 대열에 항우도, 유방도, 그리고 한신(韓信)도 참여한다. 진시황 사후 옹립된 이세(二世)도 곧 죽임을 당하고 혼란은 가중된다. 겉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권위 아래 항우와 유방이 자웅을 겨루는 형국이다.

 초 회왕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 성을 먼저 점령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일러둔 상태.(先入定關中者王之) 누가 봐도 막강한 군사력과 야심을 가진 항우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용인술과 극기, 인내의 유방에게 천하를 허락한다.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말이다. 물론 유방이 천하를 얻은 뒤에도 드라마 같은 역사는 계속된다.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는 팽~ 달할 수밖에. 이인항 감독이 영화 속에 집어넣은 또 하나의 창작은 범증의 원모심려한 ‘메모’이다.

사마천의 역사, 이인항의 초한지


<초한지> 이야기는 이문열의 소설도 있고, 고우영의 만화도 있다. 하지만 지난 2000년간 가장 많이 읽혀진 것은 책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일 것이다. 풍부한 역사서 <사기>의 항우본기, 유방(고조)본기, 한신(회음후)열전 등을 통해 이 드라마틱한 시대의 폭풍 같은 역사 이야기가 박진감 넘치게 다뤄진다. 물론 <사기>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는 지난 2천 년간 중국 민간에서 다양하게 유포된다. 항우와 유방이 중국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건곤일척의 싸움을 초한전쟁(楚漢戰爭)이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장기판에는 ‘한’과 ‘초’가 싸우고 있다. 이들의 싸움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당연히 홍문연(鴻門宴)이다.

‘홍문연’은 진나라의 성도 함양(咸陽)의 외곽에 있는 홍문에서 열린 연회를 말한다. 홍문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섬서성에 있다.(陝西省西安市臨潼區) 기원전 206년의 일이다. 유방이 초 회왕이 언약한대로 함양을 먼저 차지했지만 불같이 화가 난 항우가 막강 군사력을 이끌고 달려온다. 유방으로서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이럴 때 유방의 참모인 장량(張良)이 한 수 거든다. 홍문에 머물고 있는 항우를 찾아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고. 항우의 참모인 범증(范增)은 유방이 찾아오면 무조건 그를 처치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유방이 천하를 차지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사마천의 <사기>와 이후 중국의 경극에서는 이 부분을 실로 박진감 있게 묘사한다.

유방은 장량이 일려준 대로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비굴하게 생존을 도모한다. 범증은 세 번이나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항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한다. 이대로 두면 대사를 그르칠 것 같아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춰보라고 이른다. 기회를 노려 직접 유방을 처치하라는 것. 그런데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장량과 교분이 있었던 항우의 친척 항백(項伯)이 검을 들고 나와 함께 검무를 추는 듯 하며 유방을 막아선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장량은 번쾌(樊噲)를 불러들인다. 번쾌가 칼과 방패를 들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뛰어들자 항우가 대노하여 누구냐고 묻는다. 그리곤, “오, 그대가 장사다.”며 술과 돼지 넓적다리를 준다. 그 와중에 유방은 줄행랑을 치고......  역사의 추는 항우에게서 유방에게로 기울고 만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지난 2천년동안 ‘홍문연’은 이런 삽화를 드라마틱하게 다루었다. 경극의 경우 번쾌의 무시무시한 등장 모습이 강조된다. 그런데 홍문에서의 연회장면이 어떤 모습을 띄었는지는 기록필름이 없는 이상 알 수 없다. 사마천은 ‘홍문연’이 열린지 100년 쯤 뒤에 그동안 전해오는 이야기와 역사서적을 종합하여 <사기>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니 실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 그런 형태로 그런 대사나 동작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이인항 감독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윤색한다. ‘홍문연’은 술자리가 아니었다. 천하 운명을 결정지을 긴박한 외교의 현장이다. 범증과 장량이 자신들의 주군인 항우와 유방을 위해 바둑을 둔다. 바둑은 천하를 갖기 위한 지략싸움이며 그들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그 대국에서도 번쾌가 남다른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준다. (스포일러!!!) “내 손가락이 몇 개냐?”며 자신의 손을 하나씩 꼽는 번쾌의 행동은 <사기>에도 없었고 그 어떤 경극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인항 식 재구성이다. (이 역시 실제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때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역사의 창의공간에 해당한다)

 

여하튼 유방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어렵게 천하를 얻고 나서는 역시 ‘궁궐의 저주’에 빠진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절대권력의 정점에서 친구도, 전우도, 스승도, 참모도 모두 죽여야 하는 입장에 빠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신의 최후는 이미 결정된 것인지 모른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연기를 보인 사람은 여명일 것이다. <첨밀밀> 등 한때 홍콩영화 전성기에 꽤 많은 팬을 거느렸던 여명이 이제는 ‘유방’ 역을 맡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니. 그런데 범증 역의 황추생이나 번쾌 역의 진소춘, 그리고 한신의 안지걸까지 홍콩배우들의 생존전략이 얼핏 보이는 듯하다. 어쨌든 항우 역을 맡은 풍소봉(馮紹峰)은 꽤 매력적인 연기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조금 난해하다. ‘하얀 복수’(White Vengeance)라니. 이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범증의 마지막 전술을 말하는지, 이름 없는 위패를 말하는지, 아니면 한과 초의 싸움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는지. (박재환, 20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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