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살아남아랏!

2011. 8. 10. 11:43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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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이 오기 전 국내 한 영화주간지에서는 이번 여름 시즌 극장을 책임질 네 편의 한국 영화를 소개하며 ‘사대천왕’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고지전>, <퀵>, <7광구>, 그리고 <최종병기 활>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사(배급사)가 자신들의 명운을 걸고 돈과 재능과 영화인재를 쏟아 부어 만든 영화들이다. <트랜스포머3>, <해리 포터> 마지막 편, 그리고 수많은 애니메이션까지 총출동한 여름극장가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는 충무로의 저력을 보여준 이들 영화를 사대천왕이라고 칭하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듯하다. 이들 작품 중 마지막으로 개봉되는 <최종병기 활>은 병자호란 때의 가슴 아픈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병자호란(1636~1637)은 조선 인조 시절에 일어난 외침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한족의 명(明)이 수명을 다하고 만주족이 중원을 장악해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유교사관에 사로잡혀 현실감각, 국제정세에 청맹과니였던 조선은 여전히 명을 떠받들고 있을 때였다. 아슬아슬한 북방외교노선이 길을 잃으면서 만주족의 분노를 사게 되고 대규모 외침을 당하게 된다.

조선 신궁, 만주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등극하는 인조반정.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무인 하나가 한밤에 습격을 받는다. 무인은 어린 아들에게 활을 안겨주며 저 멀리 개성의 옛 동료를 찾아가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비참하게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남이는 어린 여동생 자인과 함께 도망 나온다. 역적의 자손으로 낙인찍힌 채.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얹혀살던 집안의 아들(김무열)이 자인(문채원)을 연모하고 마침내 혼례를 올리게 된다. 그런데 온 마을이 축제분위기에 휩싸인 이 날 만주 오랑캐가 파죽지세로 국경을 넘어 조선을 침범하여 한양으로 돌진한다. 혼례식장은 한순간에 아비귀환이다. 만주 병사들은 조선민중을 마구 죽이고, 약탈하고, 사로잡아 간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남자고 여자고, 노인이고 애들이고 상관없이 줄줄이 오랏줄에 묶어 북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가다가 지쳐 쓰러지면 벌판에서 내버려지고 시체가 되는 것이다. 여동생의 행복만을 바라며 마을을 빠져나갔던 오빠 남이(박해일)는 이러한 만주족의 횡포를 보고는 분연히 활을 들고 일어선다. 혼자만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생을 구하고, 첫날밤도 지내지 못한 채 북방으로 끌려가는 매부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주족은 정복전쟁으로 단련된 용감무쌍한 전사들이었고 그 선봉에 선 쥬신타(류승룡)는 최고의 궁사이기도 했다. 조선 활과 만주 활이 건곤일척의 활시위 솜씨를 겨루게 된다.

아픈 역사 속에 피어난 강인한 민족정신


 

임진왜란을 거쳐 병자호란까지. 김훈의 <남한산성>을 보노라면 당시 백성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조정의 정치놀음에 분노가 치솟았을 것이다. 인조가 삼고구궤의 수모를 당해야했던 것은 국력도 약하고, 외교도 제대로 못하고, 방비도 못한 총체적 ‘조상 탓’이다. 아무리 백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유린당하여도 조정은 힘을 못 쓰고 조선 병사는 보이지도 않는다. 민초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저들이 직접 활과 곡괭이를 들고 일어서야한다는 것. 정말 비참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역적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강인한 무사정신과 뛰어난 활 솜씨를 가진 박해일 같은 ‘숨은 영웅’이 있었다는 것.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남이(박해일)가 의병처럼 일어나 조선을 벼랑 끝에서 구한다는 구국신화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사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유명대로 어떻게든 동생을 구해낸다는 것. 오빠는 조선의 산하를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며 만주족 용사들을 유린한다. 여동생 또한 그간의 조선 여인네들 마냥 한없이 나약하고 ‘질질 짜는’ 불쌍한 여식이 아니란 것. 만주 오랑캐 왕족에 맞서서도 당당하게 무기를 들 수 있는 불굴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만주족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이민족의 침략을 다룬 작품은 하나같이 이민족이 흉포하고 무식하고 잔인하고 몰인간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쥬신타(류승룡)와 그의 부하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들은 호쾌하고 남성다우며 군인정신의 발효이다. 비록 역사는 비참하지만 그 역사의 당사자들은 전쟁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물론, 그네들이 우리에게 한 몹쓸 짓은 역사적 사실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박해일-문채원-류승룡, 그리고 김무원이 들판에서 서부극처럼 맞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장예모의 <연인>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충분히 극적이며 멋있다. 우리는 누가 이길지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대결의 순간의 숨 막힘은 최고이다. 과연 조선의 조정이 버린 조선의 민초들은 자력갱생하여 살아서 두만강을 건너오지만 그 이후 조선은 강성해졌을까. 참으로 비참한 조선역사여~ 이 영화의 제목은 <최종병기 활>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활’ 자 옆에 활(活)이 떠오른다. 민초는 자고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이 불어도, 태풍이 불어도, 지진이 일어나도, 만주족이 쳐들어와도 말이다.


만주어는 살아있다


만주 청 제국의 왕궁이었던 북경 자금성에 가면 궁 곳곳에  한어와 만주어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청궁 편액.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만주족 병사들이 만주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출연배우(한국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만주어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만주어는 사어(死語)에 가깝다. 한(漢)족 말고도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중국에서 만주족은 장(藏)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종족이다. 최근 인구조사에 따르면 1,000만 명 정도 된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문화(언어)적으로 한족에 동화되어 중국어(漢語)를 사용하고 있다. 이건 중국역사의 특이성이다. 오랜 중국역사를 통해 보면 한결같다. 한족에 대항해 중국대륙을 접수한 이민족(소수민족)들은 왕궁을 함락하고 요직을 차지하지만 그 넓은 땅, 그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칭기즈칸의 원나라도, 만주족의 청나라도 그러하다. 그들은 용맹무쌍한 소수의 전사들로서 한족 나라를 차지했지만 오랫동안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들의 근거지를 떠나오면서 자기들 정체성 유지도 힘들었을 것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경우도 그러하다. 만주족은 오래 전 여진족에서 분파한 민족으로 보고 있다. 세월이 흘러 17세기 무렵 만주족이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에서 발전한 만주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그것을 문자로 옮기는 것은 그 이후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 반포한 것은 1446년이다) 만주족은 1599년 몽고어에서 차용한 문자를 이용하여 만주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중문판 참조) 알타이어 만-퉁구스 어족에 속한다고 한다. 만주족은 우리 한민족처럼 여진족에서 갈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만주어도 중국어(한어)와는 달리 우리말과 일본어의 어순이 같단다. 여하튼 만주족은 자금성을 차지했지만 그 넓은 중국 땅을, 그 많은 한족을 영원히 지배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 왕들도 처음엔 만주말만 쓰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한자어/만주어를 병용했고 신해혁명 이후엔 한어가 지배적인 공용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다. 최근 들어 중국 흑룡강(헤이룽쟝) 성을 중심으로 대학에서는 만주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만주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1200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만주어 고증을 흑룡강에서 받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 있는 만주어 전문가에게 받았단다. (대만에도 만주어 연구소가 있다) 미국도 수많은 인디언 종족이 있고 수많은 인디언 언어가 있었지만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한글은 한국 사람만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한류 붐이 일고 K-팝이 세상을 유튜브를 휩쓸면서 지구 곳곳에서 한글공부 열풍이 부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중에서 우리 배우들이 만주어를 얼마나 정확하고 유창하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에 사는 만주족 사람들은 우리에게 감사해야할 것 같다. 다 죽어가는(?) 사라져가는 그들의 얼과 문화를 영화를 통해 살려두었으니 말이다. 모르지.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최종병기 활>은 중국정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지도.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만주어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우리 인류문화의 보고‘라고 평가받을지. <최종병기 활>은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박재환 2011.8.10)


만주 관련 사이트 http://www.manchus.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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