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 천카이거 감독, 다시 풍월을 읊다 (진개가 감독 風月, Temptress Moon1996)

2008. 2. 18. 08:34홍콩영화리뷰

반응형

‘중국 5세대‘ 대표감독 천카이거(진개가) 감독의 1984년 작품 <황토지>가 소개되면서 서구세계에 경천동지할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소수의 서구권 영화평론가들은 그렇게 떠들고, 믿고 있다. 천카이거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문혁 때 무척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소년기에 겪은 심신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그의 첫 작품을 문혁당시 중국 오지에서 펼쳐지는 ‘기다림’과 ‘해탈’을 다루게 했는지 모른다. 이 작품 이후 그는 줄곧 중국적 특성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주로 ‘장엄한 역사’ 속의 ‘먼지 같은 인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패왕별희>라는 지극히 패셔너블한 감각의 영화로 깐느 황금종려상을 차지하며 동서양의 문화교류의 정점에 우뚝 섰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는 여기서 더욱 욕심을 내더니 다시 한 번 ‘중국적 특성’의 소재를 갖고 ‘서구인의 미적 감성’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내었다. <풍월>이다.

<풍월>은 천카이거의 야망이 담뿍 들어있는 작품이다. <패왕별희>의 쉬펑(徐楓)이 제작을 맡고, 장국영과 공리가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도일 때문에 확실히 깊이가 있는 영상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벽화의 <패왕별희>만큼의 문학적 향기는 이루지 못했다. 이 영화는 극의 진행이 상당히 혼란스럽다. 우선은 음울한 ‘강남 방씨’의 대저택을 비추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에 문제가 있겠지만, 편집에서 너무 많은 무리수를 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로지 ‘묵직한 주제, 거대제국 중국‘을 그리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듯한 인상을 안겨주는 천카이거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반백년 전의 중국의 퇴행적 역사공간 속으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시대적 구분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 점-1912년의 중국신해혁명이다. 손문이 남경에서 황제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수억 명의 인구, 그것도 수천 년 동안 황제의 통치를 받아오던 인민들은 역사의 바퀴에 보조를 맞출 수가 없다. 그들은 그야말로 정신적 아노미 현상을 맞아야했을 것이다.

‘古중국의 말로’는 남부 지방의 한 명문 대가 ‘강남 방씨(江南 龐氏)’의 대저택에서 이루어진다. 임칙서가 목숨 걸고 악랄한 서구제국의 아편밀매업자를 소탕한 것이 1839년이었지만 그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이었을 뿐이다. 시대의 변화에서 낙오된 중국의 인민들은 아편에 빠져 더욱 국력을 소진시켜가는 것이다. 강남 방씨 집안도 그렇다. 당시 중국 강남대부호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 강남 방씨의 대저택에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집안의 장자 팡쩡따는 아편에 빠져 산다. (전통적인 아편 흡입방법은 조그마한 물통을 연결시킨 파이프를 통해 그 증기를 입으로 빨아 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린 여동생 루이(如意). 여의는 세상 물정 모르고 대저택을 그저 뛰어다닌다. (<마지막황제>에서 자금성 밖의 세상물정에서 완전히 차단된 어린 황제 푸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쩡다’는 ‘슈이'(何賽飛)를 아내로 맞이한다. 슈이는 동생 ‘충량'(장국영)과 함께 이 저택에 들어온다. 하지만 충량은 하인과 다름없는 신세이다. 매부가 아편을 피우는 것을 돕는 것이 그의 일과이니 말이다. 아편에 빠져 사는 매부와 그의 누나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매부가 충량을 부른다. 아편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누나에게 키스하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날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결코 관객이 알 수 없다. (이 방식은 <패왕별희>에서 어린 장국영이 처음 노친에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 충량은 매부의 아편통에 ‘비상’을 집어넣는다. 충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을 가슴에 묻은 채 두 번 다시 이 곳을 찾지 않을 것이라며 떠난다.

10년 후 충량은 상하이에서 유부녀를 등쳐먹고 사는 ‘지골로'(男娼)가 된다. 강남에선 ‘비상’을 먹은 ‘매부’가 식물인간이 되고 대신, 그의 여동생 여의(공리)가 집안의 가장이 된다. 그리고 여자인 ‘여의’를 보좌하기 위해 먼 친척뻘인 ‘단오’를 옆에 있게 한다. 어린 시절 충량을 좋아했던 여의는 충량을 찾아 상하이에 오지만, 충량의 지저분한 지골로 짓거리에 실망하게 된다. 모든 좌절을 겪으며 여의는 신교육을 받은 남편(오대유)에게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비극은 끝이 없다. 충량은 부둣가에서 총에 맞아 죽고, 공리는 ‘비상’으로 식물인간이 된다. 강남 방씨의 대 저택은 단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굳이 이렇게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이 비디오를 볼 사람을 위해서이다. 이 영화는 한번 보고서는 사실 줄거리 따라가기도 버거운 감이 있다. 천카이거와 왕안억(王安憶)이 쓴 시나리오는 아마도 박경리의 <<토지>>같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러나가 너무 멋을 부린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와 오직 ‘영상미학’에만 집착한 천카이거의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내내 오리무중에 헤매게 만든다. 영화가 너무 어두워 영화의 재미를 온전히 느끼는데 방해가 될 정도이다. 장국영이 연기하는 충량의 정신적 방황은 문학적으로 이해될만하다. 하지만, 최종편집판에서 감독은 너무 많이 삭제시키고, 애매모호함으로 남겨두어 관객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만의 쉬펑이 제작을 맡았고 중국에서 제작되었다. 당시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로 시나리오 작업에 쉬치(舒琪)가 가담한 것으로 되어있다. (여배우 ‘서기’와는 다른 사람임) 게다가 <패왕별희>로 천카이거를 ‘찍은’ 미라맥스는 <풍월>을 미국에 소개하며 다시 한 번 야단법석을 떨었다. 오리지널이 너무 길고, 지루하고,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천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재편집했다. 아마, <풍월>도 나중엔 감독 무삭제판 DVD가 나오겠지. 그럼, 우리는 더욱 지루해진,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천카이거의 미학을 확인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The making of Temptress Moon (1996) (유튜브)


서구 평론가들은 장국영이 지골로로 활동하던 1920년대, 30년대의 상하이의 풍류계 모습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다지 폼나지 않는 세트였는데 말이다. 차라리 우리영화 <아나키스트>의 세트가 나을 듯.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애너 존스>보면 상하이의 댄스홀이 나오는데 아마 풍속학적으로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있다. 1932년 상하이에 문을 연 ‘百樂門舞廳'(파라마운트 댄스홀)의 경우 당대 제일의 댄스홀이었단다. 이때 이미 상하이에만 50군데 이상의 댄스홀이 있었고, 댄서도 백인, 일본인을 포함하여 3,000명을 헤아렸다고. 당시 ‘하야시 신이치로’라는 일본인 지골로가 초절정 인기를 누렸고 그를 한번 보기위해 상하이의 유한마담, 모던 걸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현재 극장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장국영이 그런 댄스홀을 무대로 제비족, 지골로, 사깃군, 범죄자로 출연하니 흥미로울 수밖에. 게다가 장국영의 연기가 얼마나 찬란한가.

공리의 연기는 보기에 따라 다양한 느낌이 든다. 충량에게 맘을 빼앗긴 순정파 시골소녀에서, 공리의 영화 속 캐릭터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굳센 의지의 여장부 모습까지 보여준다. 너무 어두운 화면에서 튀어나온 백색의 얼굴은 때때로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깊은 연기세계를 보여주는 듯.

영화에서 몰락한 중국의 대가문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가 어두운 화면에서 종종 나타난다. 아편연기 가득한 공간에서 묘종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근친상간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낸다. 하지만, 천 감독의 그러한 의도적 영화만들기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하나 특이한 것은 주신(周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천카이거 감독 눈에 띠어 오디션을 거쳐 이 영화 네 장면 출연했다고 한다.(못 찾겠다!!!) 주신은 이 영화 말고 천 감독의 다음 작품 <시황제암살>에도 단역 출연했다. 주신이 누구냐고? <수쥬>에 나왔던 중국배우이다. 중국대륙에선 조미만큼 인기 있는 연기파 배우이다.

참, 천카이거 감독 신작이야기.. 한국까지 와서 최인호 원작의 <몽유도원도>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작발표회까지 가진 천감독이지만 현재 이 영화에 대해선 깜깜 무소식이다. 미국자본으로 영국에서 찍은 <킬링 미 소프틀리>는 혹평을 받았다. 대신, 얼마 전 중국에서 개봉된 <투게더>(和니在一起)는 중국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영화는 얼마 전에 열린 성세바스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투게더>는 가위눌린 듯 매달리던 ‘중국의 중후한 역사물’에서 탈피한 가족 드라마이다. 천 카이거 감독의 대변신이 보고 싶어진다. (박재환 2002.10.9.)

[풍월/ 風月] 감독: 진개가 출연: 장국영,공리,임건화, 하새비, 오대유 (Temptress Moon,1996) 

반응형